1
나는 프레지(Prezi)에서 일했었다. 캔버스 기반의 프레젠테이션 툴, 슬라이드를 한 장씩 정직하게 넘기던 파워포인트와는 완전히 다른 물건이었다. 화면이 줌인 줌아웃하며 날아다니는 그 화려함에 다들 넋을 놓았다. 특히 화려하게 발표하는 걸 좋아하는 한국인을 제대로 저격했다.
2
한동안 프레지는 잘나갔다. 그런데 이 화려함을 지탱하던 게 하필 플래시(Flash)였다.
2010년, 스티브 잡스가 플래시는 끝났다는 편지를 공개적으로 띄웠다. 아이폰과 아이패드는 아예 플래시를 지원하지 않겠다고 선을 그었다. 세상이 html5로 넘어가는 신호탄이었다.
문제는 프레지의 줌인 줌아웃, 그 정체성 자체가 죄다 플래시 위에 얹혀 있었다는 거다. 프레지 엔지니어링 팀 스스로도 이 전환에 십수 명의 개발자가 몇 년을 매달렸다고 털어놓은 적이 있다. 화려함을 만들어준 기술이, 그대로 발목을 잡는 족쇄가 됐다.
3
고객도 마찬가지였다. html5로 확 갈아타자니 익숙한 화면에 정든 고객들이 아우성이었다. 발표 자료 하나하나가 다 그 위에 얹혀 있었으니 당연했다.
결국 프레지는 어정쩡한 답을 냈다. Flash 버전은 Prezi Classic, html5로 만든 제품은 Prezi Next라는 이름으로 각각 서비스했다. 고객들은 혼란에 빠졌다. 어느 걸 눌러야 하나-
그렇게 어정쩡하게 버티며 고객들은 떠났고, 서비스 경쟁력도 잃었다. 그 뒤로 동료 여럿이 옷을 벗었고, 회사의 폭발적인 성장세도 꺾였다. 화려하게 날아오르던 회사가, 어느새 그냥 버티는 회사가 됐다.
4
잘나가다 이렇게 무너진 곳이 프레지 하나뿐이던가.
코닥은 1975년에 세계 최초로 디지털카메라를 발명해놓고도, 필름 매출이 잠식될까 두려워 그 기술을 창고에 처박아뒀다. 결국 자기가 만든 기술에 자기가 잡아먹혀 2012년 파산했다.
블랙베리는 쿼티 자판과 보안이라는 강점에 취해 있었다. 세상이 아이폰, 안드로이드의 앱 생태계로 넘어가는 동안 폐쇄적인 자체 OS를 붙들고 있다가 2016년 하드웨어 사업을 접고 중국 업체에 넘겼다.
폭스바겐은 지금 이 순간에도 비슷한 수업료를 내고 있다. 중국에서 벌어들인 돈에 취해 전동화 전환을 미루다, 결국 10만 명 감원과 공장 폐쇄 앞에 섰다.
이유는 다 비슷하다. 잘 될 때 붙잡고 있던 것을 놓지 못해서다.
5
프레지는 지금, 그때와 비슷한 자리에 다시 서 있다.
요즘 리뷰들을 찾아보면, 프레지의 AI 기능이 감마(Gamma)나 뷰티풀에이아이(Beautiful.ai) 같은 후발주자에 몇 년이나 뒤처져 있다는 평가가 나온다. 플래시 다음은 html5였고, html5 다음은 AI였는데, 또 한 발 늦은 셈이다.
6
영원히 잘나가는 회사는 없다. 어제 나를 키워준 무기가, 오늘은 나를 묶는 사슬이 된다.
음식에 유통기한이 있듯, 모든 성공에도 유통기한이 있다. 영원한 성공은 없다.
잘나간다고 뻣대지 말자. 지금 이 순간에도 과거를, 심지어 지금의 성공까지 부정하며 계속 정진해야 한다.
그래야 1년 뒤, 5년 뒤 살아남는다.
아, 잘나가는 게 아니라, 생존하는 거다.
살아남기 위해선 과거를 부정해야 한다.
Member discussio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