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주말에 간만에 〈냉장고를 부탁해〉를 틀어놓고 아무 생각없이 봤다. 오랜만에 보는 예능이라 그 자체로 즐거웠다.
이번 미션이 좀 독특했다. 소녀시대의 수영이 귀차니즘이 심해서, 도구 많이 안 쓰고 설겆이도 안 나오는 가벼운 메뉴를 부탁했다. 쉐프들은 열심히 조리했다. 제한된 도구를 갖고 말이다.
그 광경은 촌극이었다. 칼로 썰면 될 복숭아를 가위로 깎고, 지퍼백에 야채를 넣고 주먹으로 짓이겼다. 인덕션에서 끓이면 될 찌개는 전자레인지에 넣고, 몇분마다 문 열어 젓고 다시 넣고 또 열어 확인했다. 어느 쉐프는 결국 가위질하다 손을 놓고 웃음을 터뜨렸다.
패널들도 못 참고 그냥 도구 써라-라며 혼내며 웃었다.
편하게 하려다 더 복잡해지는 일, 흔하다.
도구를 안 쓰는 게 목적이 되어버리면, 요리는 뒷전이 된다.
2
AI가 너희를 자유롭게 하리라?
어느 정도는 자유로워지나, 마감질은 사람이 해야한다. 아니 무조건 해야한다.
미국의 한 대학 교수가 시험 문제를 냈다. 문제 중간에 하얀색 폰트로 안 보이게 엉뚱한 내용을 심어뒀는데, 문제를 그대로 긁어다 AI에 넣은 학생들은 그 내용마저 프롬프트로 인식한 답을 받아갔다. 그리고 대부분 낙제했다.
가장 잔인한 부분은, 낙제한 학생들이 딱히 게을렀던 게 아니라는 거다. 오히려 성실했다. 다만 검토라는 마지막 한 단계를, AI가 대신 해줬을거라 믿고 건너뛴 것뿐이다.
도구를 쓰는건 좋은데, 너무 의존하면 또 탈이난다.
3
몇년전, 이직 협상을 하던 때다. 스톡옵션과 인센티브가 복잡하게 엮인 구조였는데, 판단하기 귀찮아서 AI에 던져놓고 그 계산을 그대로 들고 협상에 임했다.
기업이 어떤 가치에 도달했을 때 내가 받는 옵션의 가치가, 도무지 말이 안 됐다. 그 가치에 어떻게 도달하느냐, 소설도 작작 쓰라며 역정을 냈다.
알고보니 AI가 0을 하나 빼먹고 답을 준거였다. 1/10만 달성하면 되는 일이었다. 협상 중에 알아차렸고, 사과했고, 바로 사인하고 계약했다.
(체면이 말이 아니었다. 근데 어쩌겠나, 내가 검토를 안 한 죄다.)
계산도 내 손으로 안 해놓고, 남 탓한 덕분에 협상도 불리하게 해버렸다.
4
자, 모두가 더 편하게 살고 싶다. 설겆이를 하기 싫고, 시간을 줄이고 싶고, 간편하게 만들고 간편하게 먹고 싶다.
이 마음 자체는 잘못이 없다. 문제는 편함을 좇다가, 정작 검증이라는 귀찮은 일까지 같이 던져버리는 거다. 냉장고를 부탁해의 쉐프들이 가위로 복숭아를 깎듯, 우리도 어딘가에서 애먼 도구로 애먼 일을 하고 있을지 모른다.
완벽한 자동화는 없다. 어느 정도의 도구는 써야하고, 사람의 마지막 마감질은 반드시 필요하다.
정말 잘나가는 바리스타도 완벽한 자동화 안 하고, 도구 써서 커피 내리고 직접 한 모금 음미한 후에야 손님에게 낸다. 그 한 모금이 마감질이다.
도구를 덜 믿고,
마감질은 사람이 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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